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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선계전략
분파설
거주설
   
관향(貫鄕)
진주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 일명 거타성)인데, 신라 문무왕이 취(取)하여 주(州)를 두었고, 신문왕이 거타(居陀)를 나누어 진주총관(晋州摠管)을 두었다. 그 뒤 경덕왕이 강주(康州)로 고치고, 혜공왕이 다시 고쳐 청주(菁州)라 하였다. 고려 태조가 다시 강주로 고치고, 성종 二년에 목사(牧使)를 두었으며 十四년에 진주로 고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정해군예산남도(定海軍隸山南道)라 이름하였다. 현종이 안무사(按撫使)를 두었으나 뒤에 팔목(八牧)을 정할 때 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 태조가 현비강씨(顯妃康氏)의 고향이므로 진양대도호부(晋陽大都護府)로 승격시켰으나 태종이 다시 진주로 고치고 목사를 두었으며 인조 乙亥년에 별도로 목사를 두었다.(이 때의 경계는 동쪽은 함안군(咸安郡)경계까지가 六十七리요, 진해현(鎭海縣)경계까지가 七十九리이며, 남쪽으로는 사천현(泗川縣)경계까지 二十八리요, 고성현(固城縣)경계까지가 六十六리이며, 서쪽으로는 단성현(丹城縣)경계까지 三十八리요,곤양군(昆陽郡)경계까지 二十七리이며, 하동현(河東縣)경계까지 六十七리요, 전라도 광양군(光陽郡)경계까지가 九十四리이며, 북쪽으로는 삼가현 (三嘉縣)경계까지 四十五리요, 의령현(宜寧縣)경계까지 四十리며, 단성현(丹城縣)경계까지가 四十七리이고, 서울까지는 八百 六十六리이다)

군명은 거열성, 거타성, 청주, 강주, 진양, 청천, 진산, 진강, 정해군 등으로 불리었고, 그뒤 一九二二年(壬戌)에 경남도청(慶南道廳)이 부산으로 이전될 때 진주읍(晋州邑)이 되었다가 진주부(晋州府)로 승격되었고,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진주시(晋州市)가 되면서 진양군과 나뉘게 되었다가 그후 一九九六년에 정부의 시·군통합정책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이 다시 진주시로 통합되었다.

동국여지승람 풍속편에 보면 진주 고을의 풍속은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부려(富麗)함을 숭상하였으며 여염집은 화목하고 동네가 이어졌으며, 학문 좋아함을 업(業)으로 삼고 농부와 길쌈하는 아낙들이 부지런하며, 효자와 사랑스런 자손이 그 힘을 다해 왔다고 하였고 또, 형승편(形勝篇)에는 경치는 영남에서 제일이요, 큰 산과 긴 강이 동방의 육해(陸海)이다. 비봉산(飛鳳山)은 북쪽에서 끝나고, 진산(晉山)은 남쪽에서 받치고 있다 고 하였다.

《註》
-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 : 조선조 성종때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 양성지(梁誠之) 등이 만든 지리서(地理書)인데, 각 지방의 지리·풍속 등 특별한 사실을 수록·기술한 책(총三十五권).
- 詩書(시서) : ①시전(詩傳 詩經)과 서전(書傳 書經) ②시와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