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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설(居住說)
여사촌(餘沙村)은 진주에서 서쪽으로 四十五리 되는 곳에 있으니, 지리산 동쪽 단구(丹邱)지역 이구산(尼丘山) 밑이요, 단속(斷俗)의 물이 앞뒤로 보호하듯 둘러 있고 신안강(新安江)하류가 동남쪽을 지나가는 곳이다(현재의 남사). 진천부원군(晋川府院君) 원정공(元正公) 송헌부군(松軒府君) 이전부터 그 곳에 세거(世居)하셨으나 처음 어느 대(代)부터 터잡으셨는지는 상세하지 못하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하씨의 전성기에 예의가 노나라(魯國)의 궐리(闕里)와 같아서 산을 이구(尼丘)라 이름하였다 하고 동네 어귀 개울 가에 쌍대석(雙台石)이 있는데, 감여가(堪輿家)가 이르되 하씨가 귀현(貴顯)하는 것은 이 쌍대석 때문이다 라고 하매, 아전 무리가 높은 분들(河氏)을 받드는 일이 고되므로 몰래 쌍대석을 무너뜨리니, 이로부터 하씨가 여사촌에서 거주함을 보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원정부군께서 송악(松岳)에 계신 것과 고헌부군(苦軒府君)께서 개경(開慶)과 양정(凉亭)에 계신 것은 모두 당시에 잠시 계신 것이요, 여사촌의 옛집은 그대로 있었으며, 원정부군께서 이 곳에서 돌아가시고, 문효공(文孝公)의 다섯 형제분과 네 종형제께서도 모두 이 곳에서 탄생하셨다.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姜淮伯)의 행장(行狀)에도 문효공께서 젊으셨을 때 진곡(晋曲)에 집을 지으셨다 하였는데 역시 여사촌의 옛터를 가리킨 것 같다.

목옹부군(木翁府君)께서 서울 집에 사시면서부터 여사촌의 옛집이 외손 강씨(姜氏)에게 속하게 되었고, 여러 대를 내려와 다른 사람에게 전매되었는데, 인조 때 후손 태계공(台溪公) 휘 진(溍)께서 되돌려 받으셨다. 집 뜰에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원정공께서 손수 심으셨다고 하고, 또 감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문효공께서 손수 심으신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송헌(松軒)은 송악산(松岳山) 동쪽 기슭에 있었다 하나 지금의 어느 곳인지는 상세하지 못하며, 원정부군이 여환(旅宦)하실 때 지으신 것이다. 진양연고(晋陽聯藁)에 쓰이기를 정연하지는 못하나 정남을 향하여 있어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며, 소나무와 대나무가 있어서 족히 깊은 회포를 풀 만하다 고 하였다. 원정부군께서는 공암(孔巖) 허형(許衡) 등과 더불어 도의계(道義契)를 맺고 늘 이곳 송헌에 모여 한가히 즐겨 노셨다. 부군께서 고향 집에서 돌아가신 후 세월이 오래 되어 송헌이 퇴폐해지므로 목옹부군께서 다시 수리하여 영모재(永慕齋)라 이름하고, 자손에게 경계시키기를 비록 뒤에 다시 고쳐 짓더라도 반드시 옛 법을 지키고 사치하게 하지 말라 고 하셨으며, 사직(司直) 최저(崔渚)를 시켜 병풍을 만들게 하여 선대의 검소한 덕풍을 보이셨다.

개경(開慶)은 진주 동쪽 二리에 있으니, 비봉산(飛鳳山) 밑이요 옥봉(玉峯)의 입구이다. 촉석루(矗石樓)가 서쪽에 있고 청천강(菁川江)이 그 남쪽을 지나 흐르는데, 이 곳에 개경원(開慶院)을 고헌부군께서 지으신 것이다. 고헌 부군께서 원수(元帥)로 계실 때 집을 생각하여 지으신 시(詩)에 양성정(養性亭)의 서쪽이요 촉석루의 동쪽이라 하신 곳이 바로 이 곳이다.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개경원기에 쓰기를 경산부사(京山府使) 하공 호보(河公 浩甫 : 봉산군 有宗부군의 字)가 일찍이 옛집 옆에 한 집을 세우고자 하였다고 하였으니, 개경에서 사신 것이 봉산군께 전하여진 것이다. 상고하건대, 봉산부군의 묘소가 양주 땅에 있으니, 생각해 보면 그 아드님 지평공 휘 윤(潤)께서 본조에서 벼슬하셨으니 봉산군 역시 경성에 계셨던 것이 목옹부군과 같았던 것 같다.

고헌부군의 외손인 지평공(持平公) 정기(鄭其)가 경주에서 와서 개경에 살았거니와, 그의 묘비에 쓰이기를 공은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고헌공 하윤원(河允源)의 외손인데, 그 모친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진양에 와서 살았다 고 하였고, 또 그의 부인 강씨(姜氏)의 묘지(墓誌)를 살펴보니, 지평공이 늘 개경에서 살았다 하였으니, 개경 집 역시 외손에게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만력 병오보에 봉산군은 후손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숙종 경인년에 부사공(府使公) 휘 덕휴(德休) 부군께서 함흥에 순찰사 일행으로 가셨을 때 함종(咸從)에 거주하는 종씨를 만나 그 선계를 상고하니, 곧 봉산군의 후손이었다. 정조 癸卯년에 은암공(隱庵公) 정익(廷益) 부군께서 관서지방에 가신 일이 있어 함종에 사는 하종협(河宗浹)씨를 만나 그 분이 간수한 계첩을 보니, 봉산군의 아드님에 지평공(持平公) 휘 윤(諱潤) 부군이 계셨고, 그 아드님에 안주목사(安州牧使) 휘 한우(漢佑) 부군이 계셨는데 세조 때 함종으로 귀양가 토민이 되었다고 하였다. 만력보가 임진왜란 후에 이루어졌고 함종이 멀리 떨어져 있어 당시의 족보에 참여하지 못하였음은 당시 사정상 그리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정(凉亭)은 단성현 제六 방(坊) 신안강 가에 있으니, 이구산과는 十리도 못 되는 거리에 있다. 단구지(丹邱誌)를 살펴보면, 진산부원군 하윤원부군께서 양정을 강 가에 지어 노년을 보내셨다고 하였다. 아드님 군사공(郡事公) 휘 계종(啓宗) 부군께서 음관(蔭官)으로 문경현감(聞慶縣監)을 지내시고 (고려가 망한 뒤) 정대창담(鄭大昌潭)가의 산골에 이거하셨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문경동이라 불렀으나, 실은 고헌부군께서 노년을 위하여 지으신 것인데, 율곡(栗谷 : 땅 이름)에서 어머님 시묘(侍墓)를 하실 때 돌아가시니, 강변의 양정은 막내 아드님 군사부군에게 전해진 것이다.

(문경공의 장자(長子) 중정공 휘 숙(潚)의 후손이 여러 대에 걸쳐 진주 서쪽 신풍(新豊)에 거주하였는데, 어느 대에 양정에서 옮겨 왔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 차자 문효공께서 경상감사로 계실 때 차자(次子) 현감공 휘 척(滌)에게 창녕 옥야에 터를 잡아 주시니 그 후손이 거주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안렴공 휘 중룡(仲龍) 역시 문경공 아드님이신데, 진주에서 남원 둔덕으로 이주하시어 자손이 거주하게 되었다.)

구경당(具慶堂)은 서울 돈의문(敦義門)밖에 있었다. 문효공께서 젊으실 때 진곡(晋曲)에 집을 지으셨는데 통정 강회백(姜淮伯)이 장차 크게 쓰일 인물임을 알고 서울로 가기를 권하므로, 드디어 서울의 주동(鑄洞)에 사시게 되었다. 문효공 다섯 형제께서 조정에 벼슬하심으로 목옹(木翁)부군께서 서울에 사시게 되었으나 고려유신(高麗遺臣)으로 의리상 성안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시어 돈의문 밖에 계셨으므로, 문효공께서 어버이 옆으로 이사하고 구경당을 지어 봉양하셨다.

그 때, 목옹부군께서 마나님 정씨와 함께 八十세가 넘으셨으나 강녕하셨으므로 세상이 영화롭다 여기고, 교은 정이오(鄭以吾)와 양촌 권근(權近)과 제학 최흥효(崔興孝)와 판원 조말생(趙末生)과 참판 신인손(辛仁孫)등이 시(詩)로써 노래하였고, 청향 윤회(尹淮)가 그 일을 기록하였다.

부군 내외분이 돌아가시고 삼년상이 끝난 뒤 문효공께서 수리하시되, 띠짚으로 하시고 그 곳에 거하시며 편액(扁額)을 고쳐 영모당(永慕堂)이라 하셨는데 모든 자질(子姪)들이 지붕을 기와로 바꿀 것을 청하나 문효공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시되 선대의 사시던 곳을 후손에 전함에 있어 검소한 덕풍을 밝히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고 하셨다.

(문효공께서는 서울에서 돌아가셨으며, 장자(長子) 참판공 휘 효명(孝明)께서 문효공보다 먼저 돌아가셨고, 승사손(承祀孫) 현감공 휘 복산(福山)이하 五世까지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승지공 휘 태수(鮐壽)께서 호서문의(湖西文義)로 이주하셨다. 참판공 계자(季子) 형조참판공 휘 맹윤(孟潤)께서는 용인에서 거주하셨고, 문효공 중자(仲子) 좌랑공 휘 제명(悌明)의 자손은 인천(仁川), 부평(富平) 등지와 무주 무풍(茂朱茂豊)에 거주하였다. 여지승람을 살펴보면 무풍의 하씨가 기재되어 있으니 무풍에 하씨가 거주한 것은 이미 오랜 일이었다.)

진산(辰山)은 정읍(井邑) 남쪽 十리 거리에 있는데 대간공께서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휴양하시던 곳이다. 대간공의 농장이 정읍에 있었으므로 아들 참의공 휘 금(襟)께서 서울에서 상시로 내왕하셨다 하니 문효공 시(詩)에 모(某)가 호남에서 서울에 왔다 하신 것과 같다.

단종(端宗)조 때 문효공께서 돌아가셨고, 선조(先朝)의 대신들이 많이 피살되고 인심이 요란하니 대간공께서 기미를 예찰하시고 진산에 물러나 계시다가 돌아가시어 우산곡(牛山谷)에 안장되셨다. 참의공께서 아들 일곱 분을 두셨는데 모두 현달하셨다. 진산과 우산 사이에 칠송정(七松亭)이 있었는데 대개의 소나무를 손수 심고 노시던 곳이었다고 그 곳 주민들이 지금까지도 전하고 있다.

당시에는 여러 자제들이 벼슬이 높았고 집들이 웅대하였으며, 진산과 우산 사이의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도 하씨의 소유물이 아닌 것이 없었는데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진산의 안산에 암석이 홀(笏)을 잡은 듯 서 있는 것을 감여승이 잘못 판단하여 파괴한 후로 자손이 그 곳을 보존하지 못하고(지금 충무공 이순신의 현충사 터) 호남 영남 등지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참의부군 자손들은 혹 이웃 고을로 옮겨갔고 혹 섬으로도 들어갔으며, 중추공 휘 여(礪)의 아드님 감사공 휘 자청(自淸)께서는 진주 운곡(雲谷)으로 돌아오셔서 후손이 지금 안계(安溪)에 거주하고, 군수공 휘 치(治)께서는 산수의 좋음을 취택하여 동복(同福)으로 이주하시어 자손이 거주하였다. 중훈공 휘 추(樞)께서는 일찍 돌아가시어 묘소도 실전되었으며 거주하신 곳도 알 수 없으나 아드님 사직공 휘 중산(仲山)의 묘소가 진주 땅에 있고 자손이 지금 진주에 거주하니, 중훈공께서 서울에서 돌아가셨으면 대간공께서 정읍으로 내려가실 때 사직공의 나이가 열 살이 못 되었으므로 서울에 두고 내려가시지는 아니하였을 것이요, 또 서울에서 진주로 바로 돌아오시지도 아니하고 반드시 진산에 따라오셨다가 감사공과 동시에 진주로 오신 듯하다.)

연당(蓮塘)은 인천 소래산(蘇萊山)밑에 있다. 문효공이 돌아가심에 세째 아드님 동지공 휘 우명(友明)께서 소래산에 받들어 안장하고 시묘살이하였으며 상을 마친 후에는 소래산 밑에 집을 짓고 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호를 연당이라고 하셨다. 동지공께서는 천성이 효성스러워 문효공 및 정경부인 화상을 손수 그리고, 못 북쪽에 영당을 세워 모셨으며(연산乙卯一四九五년에 공의 화상도 함께 모셨다), 문효공 및 공의 충효 정려문이 영당 밑에 있었다. 선조(宣祖)때 영당과 충효 정려문은 합천 야로(冶爐)에 옮기었으나 연당은 지금도 있고, 연당 위에 공의 효자 비각이 있는데 부사 최흔(崔昕)이 세운 바다.

(동지공 승사손이 그 곳에 거주했는데 후손이 없다. 차손(次孫) 충순공 한필(漢弼)과 사직공 한우(漢佑)께서는 외가인 합천으로 옮기셨으며 지금도 후손이 거주하고, 동지공 차자 현감공 철행(哲行) 후손도 합천에 거주한다. 그리고 계자(季子) 내금공 철년(哲年) 종손은 인천에 거주하였다)

여지승람을 상고해 보면 하씨가 거주하는 곳이 四十 고을이라고 하나 지금 상고할 수 있는 것은 겨우 대여섯에 지나지 않으며 이 외에 임시로 거주한 것은 다 중엽(中葉)부터이라, 죽고 이사하고 고향을 떠난 흥망(興亡)의 무상함을 알 수 있다. 국조문과보(國朝文科譜)에는 강화하씨(江華河氏)가 있으나 여지승람에는 없으니 생각컨대 임시 거주지로 입적(入籍)한 것이요 본관(本貫)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방에 있는 하씨는 비록 귀천(貴賤)이 다르더라도 모두 진양하씨가 아닌 사람이 없다.

《註》
- 闕里(궐리) : 중국 산동성 곡부현(曲阜縣)의 마을. 공자(孔子)가 처음 학문을 가르치던 곳.
- 尼丘(이구) : 산동성 곡부현 동남에 있는 산. 공자의 자(字)가 중니(仲尼)이고, 이름이 구(丘)임은 이 산 이름에 연유한 것임.
- 堪輿(감여) : ①천지(天地) ②상지(相地 : 땅을 보는 일) ③堪輿家 : 風水家.
- 行狀(행장) : 죽은 사람의 평생 지낸 일을 적은 글.
- 旅宦(여환) : 벼슬에 있으면서 여행하는 것.(출장, 파견근무)
- 蔭官(음관) : 조상의 공덕으로 얻은 벼슬.
- 侍墓(시묘) : 부모의 거상(居喪)중에 무덤 옆에서 막을 짓고 사는 일.